인종(仁宗 왕해)
고려 제17대 왕(재위:1122~1146)
묘청의 난 진압과 서경천도운동 좌절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나 내치에서는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고, 군제를 정비하였으며, 과도한 불교행사 억제 및 유교주의 이념의 생활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인종은 1122년 2월 15일 중서령 이 작승의 맏아들로 태어났어요. 이름은 해이며 자는 인표였어요.
어려서부터 성품이 어질고 효성이 지극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글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12세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9살 어린 나이에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숙부였던 대령후 경을 섬겨야 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무신정변이 일어나면서 문신들이 모두 쫓겨나고 말았어요.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일부는 귀양을 가게 되었어요. 다행히 인종은 무사했지만 언제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지 몰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최충헌 형제가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에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면서 다시 조정에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에까지 오르게 되었어요. 하지만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충헌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다가 1년 만에 갈라서게 되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동생이었던 명종이 왕위에 올랐어요. 비록 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신하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지냈어요.
그러다가 신종이 세상을 떠나자 8개월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잠시나마 권력을 잡았지만 곧이어 일어난 김돈중 사건으로 인해 폐위되고 말았어요.
이것이 바로 유명한 ‘묘청의 난’이에요. 물론 처음에는 반란군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오히려 개경 중심의 귀족 세력들을 몰아내고 서경 천도를 추진했어요.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있었고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포기해야만 했어요. 이로 인해 민심마저 잃게 되자 마침내 1146년 7월 5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재위기간 동안 나름대로 개혁정치를 펼쳤던 임금이었어요.
특히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고 승려 행사를 제한했으며 팔관회 같은 종교 행사를 축소시켰어요.
이러한 정책 덕분에 사회질서가 안정되었고 민생이 점차 회복되었어요.
하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격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요. 게다가 무리한 궁궐 공사나 잦은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어요. 결국 오랫동안 준비했던 개혁정책마저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어요.
의종(毅宗 왕현)
제18대 왕(재위 1146~1170)
고려시대 무신정권 시대인 1170년 정중부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면서 문신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 있었어요. 이때 왕이었던 의종은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에 올랐는데요, 이후 1231년 몽골제국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면서 강화도로 천도하게 됩니다. 이때 당시 최 씨 무인정권이 집권하던 시기였는데, 원나라의 간섭과 내정간섭 속에서도 끝까지 항쟁하다가 결국 원종 때 항복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돼요. 그렇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시절 최고권력자였던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순으로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알아볼까요?
최충헌은 왜 교정도감을 설치했을까요? 교정도감은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임시 기구였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정치기구로서 많은 권한을 행사하였는데요, 특히 도방과 더불어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그리고 자신의 사병조직인 도방을 통해서 군사권도 장악하였답니다. 또한 노비 만적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신분제 사회 내에서의 지배층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어요.
경대승은 누구인가요? 경대승은 승려 출신으로 108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104년 서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었어요. 그러나 서경 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다 전사하였고, 죽은 후 문하시랑평장사라는 벼슬이 추증되었답니다.
정중부의 난이 뭔가요? 1170년(의종 24) 8월 15일 발생한 무신란이에요. 이날 밤 보현원에서 연회를 베풀던 국왕 및 문신 관료 100여명을 살해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보현원사건’이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실 사람으로서 장군직에 있던 정중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즉, 김보당·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대장군이 된 정중부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불만을 폭발시켜 거사를 일으킨 것이죠.
김보당의 난은 어떤 사건인가요? 1067년(문종 21)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난 김보당은 18세에 음서로 등용되었고, 26세에 내 시낭 중이라는 요직에 오르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 인종 즉위 후 이자겸 일파에게 밀려나게 되자 다시 복직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인종이 거처하는 궁궐 앞에서 통곡하며 시위하였어요. 그러자 인종은 “너 같은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하면서 귀양을 보냈답니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김보당은 한때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으며, 이듬해 병사하였습니다.
조위총의 난은 어떤 사건인가요? 1108년(예종 3) 5월 경상도 상주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에요.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던 호족 세력이자 동북면 병마사였던 조위총이 주도하였으며, 인근 지역의 관노비까지도 합세하였다고 해요. 이로 인해 2개월 동안 계속된 봉기로 말미암아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답니다.
최충헌은 언제 죽었나요? 1219년(고종 6) 4월 19일 사망했습니다. 향년 70세였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