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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태조 태종 세조

태조(太祖 이성계)

 

이성계는 조선시대 제1대 왕입니다.

고려 말 혼란스러운 시기에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후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결국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해 다시 한번 위기를 맞이했고, 병세가 악화되어 함흥차사라는 말과 함께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성계는 왜 이름이 두개인가요?

이성계는 원래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이때 당시엔 성이 없었는데, 성인이 된 후에야 이성계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출신성분(여진족)을 숨기고자 본관을 전주라고 하고 성씨 또한 이 씨로 고쳤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조 이성계는 진짜이름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환조'라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이성계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이성계는 무인출신이었지만 문인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특히 시문에 능했다고 하는데요, 무예실력뿐 아니라 정치수완도 뛰어나 여러 차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과전법 시행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경제정책, 교육정책, 군사정책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성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이성계 하면 역시나 최영장군과의 싸움이죠. 1388년 요동정벌을 위해 출병했으나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며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태종(太宗 이방원)

 

조선시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한 태종 이방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등 다양한 사료들을 참고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어떤 사람인가요?

태종 이방원은 고려말 정몽주를 제거하면서 유명해진 인물입니다. 당시 이성계에게 반대하던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꿈꾸는 신진사대부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결국 1392년 4월 25일 개성 선죽교에서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때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자신 또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도 계속되는 정적제거 작업 끝에 마침내 1418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왜 그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나요?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정치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먼저 사병혁파를 통해서 군권을 장악했고, 의정부 서사제를 시행함으로써 행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신문고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6조 직계제를 들 수 있습니다. 6조 직계제란 국왕이 직접 육조판서를 임명하는 제도로서 중앙집권화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어떻게 죽었나요?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만큼 사후에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태종이 죽은 후 아들들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심지어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마저 세자자리에서 쫓겨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병으로 일찍 죽는 바람에 막내아들이었던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16년간 세자생활을 한 뒤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조(世祖 이유)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입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지만 재위기간 동안 수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사육신 사건 이후로는 신하들에게 엄청난 신임을 얻었다고 해요. 하지만 말년에는 아들 예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고 손자 성종 때 일어난 연산군의 난정으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과연 세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세조는 왜 수양대군인가요?

원래 이름은 유(瑠)이고 자는 수지(粹之)라고 하는데요, 아버지 문종과는 달리 몸이 허약했고 성격 또한 매우 급했다고 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던 어머니 소헌왕후 심 씨로부터 ‘수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이후 스스로 호를 ‘수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를 따서 정식 호칭처럼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세조는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요?

단종 2년 1453년 10월 10일 밤, 계유정난 당시 거사를 일으킨 한명회 등 신숙주, 구치관, 홍윤성 등 이른바 ‘계유정난 4 공신’들이 경복궁 후원 별궁 건춘문 앞에 모였습니다. 이때 김종서 장군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준비한 칼자루를 쥐고 있던 자가 바로 세조였어요. 이날 새벽 5시경, 궁궐 안에서는 정인지·한명회·권람·홍달손 등이 군사들을 이끌고 입궐했습니다. 이미 전날 저녁 무렵부터 궐내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병사들은 궁성의 동쪽 문인 흥인문 밖에서부터 몰려오는 반란군을 향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어요. 곧이어 광화문 일대에서도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김종서 일당을 죽여라!”라는 외침이었죠. 이렇게 해서 쿠데타 세력은 순식간에 도성 내 대부분의 주요 관아를 장악했어요.

 

 

세조는 누구랑 결혼했나요?

세조는 정희왕후 윤 씨와 혼인했는데요, 그녀는 파평부원군 윤번의 딸로 처음에는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나 두 사람은 슬하에 자식이 없자 서로 마음을 열고 부부애를 다졌다고 합니다. 훗날 정희왕후는 둘째 아들 예종의 죽음 이후 왕실의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세조와의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