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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인물 궁예 견훤

궁예(弓裔)

 

재위 901년 ~ 918년 (17년)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901년 후고구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고, 이후 강원도 철원군 태봉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면서 다시 재기한 인물입니다. 또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미륵사상을 신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폭정을 일삼으며 백성들로부터 민심을 잃게 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궁예는 왜 그렇게 포악했나요?

사실 궁예는 어릴 때 부터 총명하기로 유명했는데요, 이러한 점 덕분에 일찍부터 승려가 되어 불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894년 승하한 아버지 성골장군 홍술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8대 왕(재위 900∼918)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요, 이때 나이가 불과 18세였다고 하니 얼마나 어린 나이에 즉위했는지 알 수 있겠죠? 이렇게 어린 나이에 즉위한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불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격화되어 갔고, 이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왕비 강 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마저 죽이게 되면서 더욱더 광기로 치닫게 되었죠. 게다가 아내였던 강 씨와도 사별하면서 외로움 속에서 점차 미쳐갔다고 해요.

 

궁예는 어떻게 몰락하나요?

결국 마지막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궁예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적대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측근들조차 등을 돌리게 되었는데요, 심지어 부인이었던 강 씨마저도 떠나버리고 말았죠. 그러자 궁예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국고를 낭비했고,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탄핵하자 “나는 관심법으로 세상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귀양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양길의 부하 장수였던 기훤·양길 부자를 비롯한 많은 세력가들을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권력욕에만 눈이 멀어있던 궁예는 마침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비치는 궁예이지만, 우리에게는 비운의 군주이자 안타까운 삶을 산 인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견훤(甄萱)

 

견훤은 후백제의 초대 왕입니다.(재위 892년 또는 900년 ~ 935년)

신라 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인물이죠. 하지만 아들 신검과의 불화로 인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탈출해서 고려에 귀순했습니다. 이후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했고, 결국 936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후계 문제로 장남 신검이 반발하자 이를 제압하고자 넷째 금강을 죽이고 막내아들 능예를 옹립했죠. 이 과정에서 큰아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둘째 아들 양검과 셋째 아들 용검은 물론이고 부인이었던 헌정왕후와 두 명의 딸마저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죠. 이렇게 해서 세워진 나라가 후백제입니다.

 

 

후백제 건국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892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대략 60세쯤에 후백제를 건국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맏아들 신검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왜 그랬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첫째 아들 신검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이자 상주의 호족 출신인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시키고 자기가 직접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었죠. 그래서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할까 두려워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견훤은 위기감을 느끼고 몰래 도망쳐 나와서 고려에 투항하게 된 것입니다.

 

 

고려에 투항한 견훤은 어떤 대접을 받았나요?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백제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고 했습니다. 특히나 옛 백제 땅이던 전주 지역 주민들에게는 큰 관심을 가졌죠. 게다가 이미 궁예 정권 때부터 나주 지역 등 서남해안 일대에서도 반신라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견훤은 어렵지 않게 고려 왕실로부터 우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경순왕 역시 자진해서 고려에 귀부 했을 뿐 아니라 경주 지역 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견훤으로서는 든든한 후원군을 얻은 셈이었죠.